12월 13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SK텔레콤 남산 사옥. 세 남자가 2층 회의실에 모였다. 검정 패딩을 입고 서글서글하게 웃는 강철 국민연금공단 사회적가치실현단 상생협력부장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후 올린 머리에 말끔한 회색 슈트를 차려입은 유준규 LOVE FNC 센터장이 도착했다. 파마 헤어스타일에 장난기 어린 눈매를 지닌 이상진 하나투어문화재단 디렉터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각자 공공기관, 연예기획사, 여행사 소속인 만큼 모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공통 관심사가 있다. 바로 ‘사회공헌’이다. 강 부장, 유 센터장, 이 디렉터가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공헌 사업을 담당한 지 9년, 6년, 10년이다. 이들은 매달 사회공헌 담당자 모임인 CSR포럼에서 사업 비결을 공유한다. 다른 업계에서 모였는데도 항상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이코노미조선’이 이들을 모아 ‘기업 사회공헌 실무자 좌담회’를 열었다. 대기업의 사회공헌은 주목받지만 중견기업의 사회공헌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양한 업계의 중견기업 담당자에게 실무 노하우를 물었다. 아직 사회공헌 전략을 수립하지 않은 중소기업에 본보기가 될 만한 내용이 많이 나왔다. 좌담회 진행은 CSR포럼의 김도영 대표가 맡았다.
◇김도영 CSR포럼 대표(이하 Q) 소속 기업에서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하는 이유는.
강철 국민연금공단 상생협력부장 "공공기관은 윤리경영을 따른다. 경영 평가 목록에 윤리경영 항목이 포함돼 있기도 하다."
유준규 LOVE FNC 센터장 "기업 오너의 비전이 담겨 있다."
Q 담당 업무는.
강철 "사회공헌, 동반성장, 사회적 경제 등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유준규·이상진 하나투어문화재단 디렉터 "기업과 재단 사회공헌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회공헌 형태는 두 가지로 나뉜다. 기업 내부 부서를 만들거나 재단을 만들어서 여기에 기부금 형태로 사업 예산을 출자한다. FNC엔터테인먼트는 2015년 한성호 당시 FNC엔터테인먼트 대표(현 총괄프로듀서)가 사재를 털어 LOVE FNC를 만들었고, 하나투어는 업계 최초로 2017년 하나투어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유 센터장과 이 디렉터도 본사에 있다가 재단으로 적을 옮겼다.
Q 기업이 재단을 별도로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준규 "재단이 생기기 전엔 비영리단체(NPO)와 간접 사업을 같이했다. 직접 사업을 진행해야 연예인 일정을 유동적으로 관리하기 수월하다. 오너의 주문도 있었다. 재단에서 사업을 계획하고 관리해야 기업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
이상진 "사회공헌 사업이 고도화되고 확장성을 가지기 위해선 재단이 필요하다는 내부 판단이 있었다."
Q 사업을 설명해달라.
이상진 "기업 역량을 이용한 사업을 진행한다. 하나투어문화재단의 경우 경제적 이유 등으로 신혼여행을 가지 못한 부부, 보호관찰소 청소년, 다문화 가족, 저소득 가정, 사회복지사 등을 위한 여행 지원 프로그램 ‘희망여행’을 운영하고 있다. 항공·숙소 예약, 여행 콘텐츠 기획까지 모두 우리의 전문 분야다."
강철 "우리도 본업과 연계한 사회공헌을 시행하고 있다. 공단은 국민연금 가입자, 수급자, 장애인,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가입자 영역으로 국민연금 가입자 가운데 연금을 내기 어려운 취약계층에 무담보, 무보증 대부 사업을 집행한다. 수급자 생활 지원이나 장애인 여행 복지 사업도 있다. 전 국민이 우리 고객이다 보니 지역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지역사회와 협약을 맺고 지역 소멸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상진 "(강 부장의 사회공헌 활동은) 다자간 협력 모델의 좋은 예시다. 우리도 여러 사람, 조직과 협력한다.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의 하나로 ‘지속가능한 여행’을 지향한다. 자연 생태계가 훼손되고 있는 관광지에서 대책 마련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해 관광지로 유명한 팔라우 공화국에 해양 전문가, 인문학자, 아티스트, 건축가, 해양학 박사, 여행 전문가가 가서 문제점을 모았고, 현재 해결책을 담은 책을 집필하고 있다."
Q LOVE FNC에서는 어떤 사업을 진행하고 있나.
유준규 "우리 사업도 사업 연계와 다자간 협력 모델을 충족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과 함께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랩, 보컬, 댄스를 가르친다. 전문 트레이너를 수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내년엔 연기 쪽으로도 확장할 예정이다."
국민연금공단, LOVE FNC, 하나투어문화재단 모두 본업과 연계된 사업을 대표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사회공헌의 첫 번째 중요한 지점이다. 김치 담그기, 연탄 나르기, 시설 방문하기와 같은 전형적이고 일회성인 사회공헌 모델은 대중에게도, 기업 내부에서도 외면받는다고 한다. 본업과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업이 중요하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생겼다. LOVE FNC는 연예기획사인데도 학교를 짓는다. 신기하게 본업과도 연계가 잘된다고 한다.
유준규 "‘NPO가 학교 짓는데 너네는 왜 지어?’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섬이나 산골짜기 같은 사각지대에 학교를 짓는다. 프로젝트 이름이 ‘스쿨 5025(오병이어)’다. 부르키나파소, 몽골,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에콰도르에 학교를 지었다."
Q 연예인은 청소년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연예기획사가 사회공헌 활동을 하면서 청소년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유준규 "2018년 남자 밴드 씨엔블루의 이정신 과 걸그룹 AOA의 설현이 미얀마에 있는 학교를 방문했다. 스케줄을 공유하지도 않았는데 주변국 태국과 라오스 팬들이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더라. 공항에서 9시간 떨어진 산골짜기 학교에 팬도 따라갔다. 정말 재밌는 점은, 나중에 이 팬들이 그 학교를 후원해준다는 것. 크리스마스엔 햄버거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갔더라. ‘20만원 모았는데 가도 될까요?’라고 회사로 연락도 온다."
Q 예수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국내에서도 연예인이 사업에 참여하나.
유준규 "연예인들이 봉사에 대한 의지가 있다. 강릉 산불 화재 때도 군 복무 중인 연예인이 전화해서 ‘모금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하고 묻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아티스트는 실버 복지에 관심이 많다. 어떤 친구는 아이를 좋아하고. 그래서 연예인이 관심을 가지는 봉사활동을 기획한다. 하지만 ‘반짝’ 관심을 끌 만한 단발성 이벤트는 지양하는 편이다."
이들에게 사업 노하우를 물었다. 각자 사업 내용은 달라도 노하우는 같았다. ①기업 구성원의 지지 ②의사결정권자 설득 ③사업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회공헌 부서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쓰는 곳이다. 그만큼 기업 내부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기 쉽다. 공보다 과가 부각되는, 칭찬보단 비난받기 쉬운 직무다. 이날 사회를 맡은 김 대표는 "그만큼 사회공헌 담당자가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면서 "그래야 사람들을 설득하고 반대를 무릅쓰고 전진할 수 있다"고 했다.
Q 사업 노하우를 알려달라.
강철 "기업 구성원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임원진이 바뀌어도 구성원의 지지를 받는 사업은 살아남는다. 지지받지 못하는 사업은 2~3년이 지나면 힘을 잃어버린다. 그래도 가만히 있지 말고 없어지더라도 한 번 도전해보라.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이상진 "사업을 지켜나가려면 기업의 의사결정권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의사결정권자가 의지가 없거나 중요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업의 위기가 오거나 수익성이 떨어지면 사회공헌 부서의 예산을 가장 먼저 줄인다. 지속해서 의사결정권자에게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이해관계를 맞추고 설득해야 한다."
Q 실무 과정에서 겪었던 고충을 이야기해달라.
이상진 "아직 사회공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취약계층은 정신적 지원보다 물적 지원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의 물적 변화보다 중요한 지점이 정신적 변화인데 안타깝다. 실제 취약계층 해외여행 지원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아동보호센터에 있는 아이가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친권자에게 여권을 만들기 위한 동의서에 서명해달라고 했더니 ‘애 머리에 바람 들게 무슨 해외여행이냐?’고 하더라. 처음에는 ‘국내여행에 보내는 방식으로 사업 방향을 선회할까’도 생각했다."
유준규 "사회공헌 부서는 외롭고 힘들다. 해보니까 가치 있고 맞는 사업이라면, ‘돌 맞고 전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외로워도 가는 게 맞다. 주변 사업 사례를 보면 그런 프로젝트는 성공하더라."
이상진 "맞다. 이 사업도 진행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한 번은 섬 마을에 보호관찰 대상 청소년의 여행을 지원했다. 육지조차 가보지 못했다고 하더라. 보고 자란 세상이 섬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몰랐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느낀 경험이 없었다. 해외에 나가서 그들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현장에서 느꼈다. 여행이 가진 힘이 있다. 여행하다 보면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집안 사정 등을 털어놓는다. 이렇게 10년 사업을 하니 주례 서달라고 연락 오는 친구도 생겼다."
기업 사회공헌의 딜레마는 ‘진정성’이다. NPO와 달리 사익과 공익을 모두 추구하니 항상 저의를 의심받는다. 인위적이거나 가식적인 사회공헌은 오히려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강철 "기부자 기념사진을 꼭 찍어야 하냐고 비판하는 내부 구성원도 있다. 보여주기식 사회공헌은 문제지만 그렇다고 인센티브가 없어선 안 된다. 돈을 내면 어깨에 힘주게 해줘야 한다. 그런 장치도 없으면 누가 돈을 내겠나. 굳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김도영 "기업이 유독 사회공헌 분야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전략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홍보 없이 좋은 일을 해야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관점 때문이다. 최근 들어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NPO에서 모금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사업을 원활히 진행하는 기법 가운데 하나가 ‘기부하는 사람이 만족하는 요소를 만들라’다. 돈 내고 폼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홍보해줘라."
Q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이상진 "공공기관과 협업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정성 지표보다 정량 지표를 보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한 명 보낼 바에야 국내 여행 다섯 명 보낸다’는 사고도 있고. 해외여행을 보낸다고 하면 포퓰리즘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여행 복지 개념이 공공 분야에 자리 잡으면 좋겠다. 새로운 기관이나 기업과 협업을 늘려나가고 싶다."
강철 "협력 관계를 위해선 기업 간 정보 교환이 중요하다. 담당자들이 자주, 많이 만나면 좋겠다. 또 한국의 어젠다가 수도권에 몰려 있는데 지역 문제에도 관심이 필요하다."
유준규 "유독 주목받는 NPO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작지만 잘하는 곳을 많이 발굴해서 보여주고 힘을 실어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생태계가 활성화될 것 같다."
[김유정·김소희 이코노미조선 기자]
출처: 이코노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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